1986년에 이축 복원된 개척자의 주택. 원래는 쇼나이번 지배하의 에도를 단속하는 우두머리가 없는 무사조직 「신쵸구미(新徴組)」의 주거로서, 1870년에 쓰루오카・다이호지・도가타에 지어진 137동의 주택중 약30동을 1875년경, 마쓰가오카 개척자의 휴게소로서 옮겨졌다. 개척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돌을 올려놓은 지붕의 단층건물. [시 유형문화재] (마쓰가오카 개척장 내)
[文化財カテゴリ:] 松ヶ岡開墾場
마쓰가오카 양잠 이나리신사
동경의 구(旧) 사카이家 저택에 자리잡고 있었던 신사를 1875년에 개척지 교즈카 언덕으로 옮기고, 마쓰가오카 신사로 한 후, 1895년에 양잠 이나리신사로 개명해 잠업의 수호신으로 한 것이다. (마쓰가오카 개척장 내)
마쓰가오카 양잠지대
1874년 개척한 311헥타르의 전면에 뽕나무와 녹차나무를 심어, 1877년부터 양잠과 차 만들기를 시작했다. 1875년부터 1877년 사이에 지어진 10동중 5동이 창건당시의 모습으로 현존. 군마현의 시마무라(현 이세사키시)의 구조방식을 채용하고 있지만, 규모는 훨씬 더 크다. (마쓰가오카 개척장 내)
마쓰가오카 본진
마쓰가오카 본진은 쇼나이번주가 에도를 왕복할 때 이용한 「오차야」 또는 「후지시마 본진」이라고 칭한 휴식소를 1872년에 이축했다. 히노키로 만든 단층건물에 지붕은 갈대로 지어졌다. 원래는 제3대 쇼나이번주 사카이 다다카쓰(酒井忠勝)가 1622년에 쇼나이에 들어와 쓰루가오카성의 확장 설비를 했을때 쓰루오카 ・다카하타(쓰루오카시 가미하타마치)의 다카하타 저택이라고 불리어졌던 임의의 한 동을 후지시마・시모마치(후지시마마치 니시카와라)에 이동한 것. (마쓰가오카 개척장 내)
마쓰가오카 개척장
메이지유신후의 1872년 구쇼나이 무사3천명이 검을 괭이로 바꾸어 광대한 토지를 개척해 산업진흥에 공헌한 역사를 전하는 마쓰가오카 개척장. 광대한 개척지의 중심지에는 개척본부로 사용된 「본진」과 기와지붕의 조슈시마무라(上州島村)식의 3층 건물의 「다이산시쓰 (양잠하는 방) 」 5동이 현존한다. [국사지] 〒997-0152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 하구로마치 마쓰가오카29
